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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노운 걸'은
"언노운 걸(La Fille Inconnue)"은 벨기에를 대표하는 다르덴 형제 감독이 연출한 사회 드라마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미스터리 영화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죄책감과 책임,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깊은 질문이 깔려 있습니다.
관객으로서 이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우리가 직접 그 상황에 처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누군가의 생명과 마주했지만 외면했던 순간, 그리고 그 선택이 불러오는 여운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합니다.
이 영화는 진실을 파헤치는 스릴러처럼 전개되지만, 그 중심엔 한 명의 의사이자 인간인 '제니'의 심리적 갈등이 자리합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무심한 선택이 누군가의 생을 앗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관객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내용
죄책감에서 출발한 추적
의사 제니는 지역 병원에서 근무하며 헌신적으로 환자를 돌보는 인물입니다. 어느 늦은 밤, 진료 시간이 끝난 후 누군가가 병원 초인종을 누르지만, 그녀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다음 날, 경찰은 병원 CCTV를 토대로 한 소녀가 죽은 채 발견되었으며, 그 소녀가 전날 초인종을 누른 사람임을 알립니다.
이 소식을 접한 제니는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고, 스스로의 윤리적 책임을 되새기며 그녀가 누구였는지 알아내려 합니다. 병원의 환자, 이웃들, 거리의 청소년 등을 만나며 조금씩 퍼즐을 맞춰가던 제니는, 이 사건이 단순한 불운이나 우연이 아닌 사회 구조 속에 감춰진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줄거리는 치밀한 추적극처럼 펼쳐지지만, 실은 제니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관객은 점점 이 소녀가 누구였는지보다, 왜 그녀는 아무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는지에 집중하게 됩니다. 언노운 걸은 단순한 추적극이 아니라 무관심 속에서 사라진 이름 없는 존재에 대한 애도이자 자성입니다.
침묵과 무관심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언제나 일상 속 평범한 인물들이 중심입니다. "언노운 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제니는 특별하거나 영웅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나 저지르기 쉬운, 피로에 지쳐 단 한 번의 응답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죄책감은 더욱 관객에게 실감 나게 다가옵니다.
영화는 사회적 무관심이 어떻게 비극으로 이어지는지를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이름 모를 소녀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도 찾지 않습니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는 단지 한 사람의 무심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스쳐 지나가던 존재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다르덴 형제는 "도움이 될 수 있었던 순간"의 부재가 어떤 파장을 불러오는지를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단죄하지 않고, 대신 침묵을 뚫고 한 걸음 나아가려는 제니의 모습을 통해 인간성 회복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모른다’는 책임과 ‘알아보려는’ 용기
제니는 자신이 응답하지 않은 그 밤 이후부터, 책임지기 위한 여정을 자발적으로 시작합니다. 그녀는 법적으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지만, 윤리적 책임에서 도망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그녀에게 감정이입하게 되고,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와 마주하게 됩니다.
"나는 몰랐어요"라는 말로 무관심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언노운 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건 몰랐다는 사실이 아니라, 이후에 그것을 알아보려는 용기입니다. 제니는 그 과정에서 때로 위협도 받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녀의 노력은 단순한 진실을 넘어서,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기억하게 하는 일로 귀결됩니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말합니다. “우리도 제니처럼 누군가를 외면한 적은 없었는가?” “우리 삶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누군가를 잊은 건 아니었는가?” 이 질문은 영화가 끝나도 사라지지 않고 관객의 마음에 오래 남습니다.
'언노운 걸'이 남기는 메시지
"언노운 걸"은 말 없는 사회 속에서 조용히 외쳤던 한 존재에 대한 기록입니다. 한 사람의 무심한 선택이 만든 결과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며, 그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윤리를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영화는 극적인 반전이나 자극적인 전개 없이도,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지나쳐버리는 "작은 선택"이 얼마나 커다란 파장을 낳을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응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관객으로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앞으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을 때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름을 붙여줘야 할, ‘알려지지 않은’ 존재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불러주는 일은, 결국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일지도 모릅니다.